옥중 만세 운동 후 그녀는 지하 독방에 갇혀 더욱 가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을 기념하는 특사령이 내려지며 유관순도 감형이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오랜 고문과 영양실조로 크게 쇠약해진 유관순은 꽃다운 열 여덟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녀의 석방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녀의 모교였던 이화학당은 형무소 측에 그녀의 시신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형무소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 월터는 이 사실을 해외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국 형무소는 조용히 장례만 치르는 조건으로 시신을 학교에 넘겨주었습니다.
훗날 유관순의 이름은 점점 더 널리 알려졌고, 광복 후 그녀의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돼 건국훈장이 수여됐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독립의 뜻을 행동으로 보여 준 청소년 독립운동가 유관순,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녀는 오늘날까지 모두에게 자유와 용기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